1. 사회가 정해놓은 시간표
부모 세대는 언제나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
“이제는 슬슬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니?”, “너도 손자손녀 보여줄 나이가 됐잖아.”
그들의 말에는 악의가 없다. 오히려 사랑이 섞여 있다.
자식이 홀로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함께 늙어갈 누군가를 곁에 두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언젠가 떠날 자신들의 빈자리를 대신 메워줄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
하지만 그 따뜻한 소망은 종종 한 개인의 시간을 향한 무언의 명령처럼 다가온다.
어디선가 “너무 늦으면 건강한 아이를 낳기 어렵다”는 말이 들려오고,
“젊을 때 낳아야 똑똑하고 튼튼하다”는 말이 덧붙는다.
그리하여 이 사회가 그어놓은 인생의 타임라인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20대 후반에는 결혼하고, 30대 초반에는 아이를 낳으며, 그 이후로는 가정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질서.
이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건 어쩌면 평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평온함은 때로 ‘개인의 리듬’을 지워버린다.
사회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속도로 늙고, 같은 시기에 정착하고, 같은 이유로 행복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리고 그 요구는 점점 더 은밀하게, 그러나 더욱 강하게 사람의 내면을 조여온다.
2. 나의 속도, 나의 방향
세상의 발전은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다.
지식을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본다면, 그 덩어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팽창하고 있다.
기술과 사상, 언어와 학문이 하루가 다르게 확장되고, 그 속도를 따라잡으려면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해야 한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왔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다.
어떤 때는 새벽까지 논문을 읽었고, 어떤 때는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을 펼치며 지적 충돌을 즐겼다.
세상은 나에게 너무 많은 ‘하고 싶은 일’을 허락했고, 나는 그 모든 가능성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결혼이나 정착 같은 단어가 내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사람들은 말한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이제는 좀 자리를 잡아야지.”
하지만 내게 있어 ‘자리 잡는다는 것’은 때로 ‘멈춘다’는 말처럼 들린다.
나는 여전히 달리고 싶은데, 왜 사람들은 멈춰야만 안심하는 걸까.
keep young and passionate myself.
이 말이 나를 지탱해온 신념이었다.
열정은 나이에 의해 닳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기준에 순응할 때 사라진다고 믿는다.
나는 여전히 배우고, 여전히 만들어가며, 여전히 성장하고 싶다.
문제는, 그 믿음이 언제나 사회적 ‘정상성’의 언어와 충돌한다는 점이다.
3. 시간의 질서에 맞서 산다는 것
한국 사회는 지금, 거대한 구조적 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국가 부채는 늘고, 물가는 오르며, 청년 일자리는 줄었다.
출산율은 이미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고령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누군가는 “나라가 늙어간다”고 말하지만, 나는 “시대가 너무 빠르게 늙고 있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불안에 쫓겨 안정적인 길을 택한다.
‘안정적인 직장’, ‘안정적인 결혼’, ‘안정적인 미래’라는 말이 너무 자주 반복된다.
그러나 나는 때로 이 단어들이 ‘굴복’의 다른 이름처럼 느껴진다.
세상의 압박에, 시간의 질서에, 그리고 타인의 기대에 굴복하는 삶.
그것은 나에게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아직 멈추고 싶지 않다.
내게 삶의 의미란 안정된 구조 속의 평화가 아니라, 불완전한 여정 속의 밀도다.
더 배우고 싶고, 더 실험하고 싶으며, 여전히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싶다.
그런 나를 세상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나는 이 말만은 남기고 싶다.
사람은 나이로 늙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시간을 포기할 때 늙는다.
나는 내 시간의 주인으로 살고 싶다.
그리고 그 시간의 질서에 저항하며, 끝까지 배우는 인간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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